도하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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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의 기적(奇跡)은 1994년 축구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마지막 순간에 본선 진출국이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결정된 사건이다. 일본이 예선 마지막 이라크와 경기 종료 직전에 동점골을 허용했기 때문에 승점에서 한국과 동점을 이루었지만 골득실차이에 뒤졌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월드컵 대회에 참가한 대한민국에서는 '도하의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천당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일본에서는 '도하의 비극(ドーハの悲劇), '도하의 참극'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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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최종 예선 상황
월드컵 1차 예선 D조에 속해서 바레인, 레바논, 인도, 홍콩등과 같은 조에 속한 대한민국은 D조를 1위로 통과했다. 6개조를 1위로 통과한 여섯팀(이라크, 이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사우디아라비아, 일본)중에서 두 팀을 뽑기 위해서 카타르 도하에서 풀리그 경기가 열렸다.
당시 대한민국은 처음 경기였던 이란과 경기에서 3-0으로 완승을 하며 기대를 하게 했다. 그러나 이후 이라크, 사우디와 경기에서 뒷심부족으로 종료직전 골을 허용해 각각 2-2, 1-1로 비겼다. 더구나 당시 2002년 축구 월드컵 유치를 두고 치열하게 겨루던 일본에게 0-1로 패배하여 1승 2무 1패를 기록, 자력으로는 본선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팀 | 승점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 |
---|---|---|---|---|---|---|---|---|
일본 | 5 | 4 | 2 | 1 | 1 | 5 | 2 | +3 |
사우디아라비아 | 5 | 4 | 1 | 3 | 0 | 4 | 3 | +1 |
대한민국 | 4 | 4 | 1 | 2 | 1 | 6 | 4 | +2 |
이라크 | 4 | 4 | 1 | 2 | 1 | 7 | 7 | 0 |
이란 | 4 | 4 | 2 | 0 | 2 | 5 | 7 |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2 | 4 | 1 | 0 | 3 | 5 | 9 | -4 |
당시 순위는 승점, 골득실, 다득점, 승자승 순으로 정해지도록 되어 있다.
모든 팀이 마지막 경기만이 남아있었다.
- 대한민국 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사우디아라비아 - 이란
- 이라크 -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이 탈락이 확정되었을 뿐, 나머지 5 팀 모두에게 진출의 가능성은 열려있었다. 대한민국은 자력 진출은 불가능하고, 가능성은 오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팀과 2 골 차 이상으로 이긴 후, 이라크:일본, 사우디 아라비아:이란 두 경기 중 한 경기가 비기는 경우 뿐이었다.
[편집] 일본과 신경전
1994년 축구 월드컵 예선은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라이벌 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시기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2002년 축구 월드컵을 유치하여 일본의 축구 붐을 일으키고자 오랫동안 준비한 상태였는데, 대한민국이 정몽준을 중심으로 월드컵 유치에 뒤늦게 뛰어들어 경쟁이 심한 상태였다. 한편 일본이 월드컵 유치에서 부족한 점이라면 월드컵 본선 대회에 참가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3회 진출한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일본팀을 월드컵에 반드시 진출하고자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카타르에서 경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일본이 월드컵 본선에 반드시 진출하고자 저팬머니를 앞세워 심판을 매수했다는 식의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한편 일본의 첫 경기는 북한과의 경기였는데, 당시 일본 응원단이 한국이라는 영어를 'KOREA' 대신에 'KEROA'라고 적어 놓은 걸개를 펼쳤다. 이렇게 E와 O의 위치를 바꾸어 '게로아'라고 쓰면 일본어로 '하인' 또는 '종'을 뜻하는 말이 된다고 생각한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런 행위에 분개했다.
특히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한민국이 일본 축구팀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축구에서 일본에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1954년에 처음 경기를 가진 이래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전적은 7승 4무로 압도적인 우위였다. 그러나 1993년 10월 25일에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후반 15분 미우라 가즈요시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얻어맞은 대한민국은 결국 자력으로는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편집] 운명의 마지막 경기
풀리그 마지막 경기는 담합을 방지하기 위해서 마지막 날 같은 시간에 치뤄지게 되었다. 마지막 경기를 남겨놓고 사우디는 1승 3무로 승점 5점이었고 일본은 2승 1무 1패로 승점 5점, 대한민국은 승점 4점이었다. (당시 승점제는 지금과 달리 승리한 경우 2점, 무승부에 1점이었다.) 대한민국이 마지막 북한과의 경기에서 승리해도 사우디와 일본이 모두 승리하면 월드컵 3회 연속 진출이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다. 사우디의 상대는 이란, 일본의 상대는 이라크, 대한민국의 상대는 북한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마지막 경기에서 반드시 대량 득점을 하여 이겨서 골득실에서 앞선 다음, 사우디나 일본 두 팀중에 한 팀이 비기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축구팬들이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의 수가 다시 한번 나타난 것이다.
최종전은 1993년 10월 28일에 열렸다. 대한민국은 후반 4분에 고정운, 후반 8분에 황선홍, 그리고 후반 30분에 하석주가 골을 성공하여 북한을 3-0으로 크게 앞서고 있었으나 다른 경기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4-3으로 이겼고 일본은 이라크를 2-1로 앞선 상황이었다. 경기가 이렇게 끝나면 사우디와 일본이 진출하고 대한민국은 탈락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2-1로 앞서던 일본이 경기 종료 30초전 코너킥 상황에서 옴란 자파르에게 헤딩 골을 허용하여 경기가 2-2로 종료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과 일본은 승점이 같아졌지만 골득실에서 대한민국이 앞서게 된 것이다. 결국 마지막 30초를 버티지 못한 일본이 탈락하고 대한민국이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과의 경기를 끝내고 월드컵에 탈락한 것으로 생각하고 고개를 숙이고 운동장에서 퇴장하던 대한민국 선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환호성을 지르며 코칭 스태프와 얼싸 안았다. 반대로 일본 선수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고 일본 응원단들도 통곡했다. 결과적으로 1994년 축구 월드컵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대한민국이 아시아에 배정된 두 장의 티켓을 따냈다.
팀 | 승점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 |
---|---|---|---|---|---|---|---|---|
사우디아라비아 | 7 | 5 | 2 | 3 | 0 | 8 | 6 | +2 |
대한민국 | 6 | 5 | 2 | 2 | 1 | 9 | 4 | +5 |
일본 | 6 | 5 | 2 | 2 | 1 | 7 | 4 | +3 |
이라크 | 5 | 5 | 1 | 3 | 1 | 9 | 9 | 0 |
이란 | 4 | 5 | 2 | 0 | 3 | 8 | 11 | -3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2 | 5 | 1 | 0 | 4 | 5 | 12 | -7 |
[편집] 결과
우여곡절끝에 티켓을 따내기는 했으나 대한민국 축구계는 큰 홍역을 치뤘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던 김호 감독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으나 일단 월드컵 본선까지는 임기를 보장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특히 당시만 해도 후진적이던 축구 시설과 대표팀 운영에 대한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이때까지 축구에 있어서는 일본을 과소평가하던 면이 없지 않았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의 축구 경기는 경쟁 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일본측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이후 2002년 축구 월드컵 유치 경쟁을 통해 강렬하게 분출되었으며 특히 1998년 축구 월드컵 예선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이 같은 조에 편성되면서 극에 달했다. 이때부터 1990년 후반까지 일본과의 축구경기는 과열양상을 띄었으며 '전통의 라이벌'이라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라이벌 의식은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상호간의 이해가 높아지면서 많이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