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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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물 선사시대 유적지 |
고려(高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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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연도 | 918년 |
멸망 연도 | 1392년 |
수도 | 개경 |
정치형태 | 봉건주의, 농업 |
종교 | 불교, 토속신앙 |
건국자 | 태조 왕건 |
고려(高麗)는 남북국 시대의 신라를 계승한 한국의 왕조로서 918년에 태조 왕건에 의해 나라가 세워진 후, 1392년 조선 왕조에 의해 멸망하기 까지 약 500여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말기 송악 지방의 호족 왕건이 건국하여 송악을 개경(開京 : 현재의 개성)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 곳으로 도읍을 정해 '황도(皇都)'라 하였다.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목차 |
[편집] 정치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더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유교의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군주가 스스로를 짐(朕), 궁궐을 황성(皇城), 군주의 존칭은 폐하(陛下), 차기 왕위를 예약한 왕자는 태자(太子), 왕의 어머니는 태후(太后), 군주의 명령은 조(詔)나 칙(勅)으로 불렀으며 궁궐 속 궁궐문을 제국에서만 사용하던 다섯 개로 만드는 등 사실상 제국에 걸맞는 제도와 규범을 갖추고, 또 주변국들로부터도 제국으로 인정받았으며, 13세기 원(元)나라에게 국권이 침탈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편집] 경제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문란해진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면서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한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편집] 사회
고려사회는 신분사회였다. 중인, 평민, 천민, 양반관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들은 문반, 무반, 귀족과 왕족이고 중인은 서리와 기술관이다. 귀족과 중인은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은 평민과 천민이 있다. 귀족은 공작(公爵), 후작(侯爵) 등의 제도를 두어 영국의 귀족과 유사한 형태를 갖췄다. 평민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있는데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민은 노비와 향, 소, 부곡민, 화척, 재인등이 있었다.
[편집] 문화
고려 초기에는 과거제와 함께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성종 이후부터는 문치주의가 성행함에 따라 필수 교양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우수한 시인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 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공예였다. 공예는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다른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