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이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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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 반란(Sepoy Mutiny)은 인도의 세포이 용병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편집] 배경
영국은 인도의 내분을 조장하는 방법으로 19세기 중엽까지 시크 교국,마라타 동맹,마이소르 왕국을 점령하여 인도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으로 인도의 정치,경제,조세제도를 무너뜨린 후 면제품을 인도에 값싸게 공급해 인도 최대의 산업이었던 면직물 산업을 몰락시켰다.
카스트 제도와 많은 악습이 있던 인도는 개혁을 시도하여 유럽의 문물을 전파하는데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영국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많은 양의 자원을 인도로부터 수탈해갔다.
영국에 대한 불만과 빈곤, 그리고 민족주의적 자존심이 세포이 반란을 발발시킨 주요한 원인이었다.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인도 용병들이 신식무기인 엔-필드 소총의 탄약통 수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 용병들 사이에서는 탄약통에는 흰두교도가 신성시하는 소의 기름과 이슬람교도가 비늘없는 생선과 더불어 먹지않는 즉, 멀리하는 돼지의 기름이 발라져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편집] 경과
1857년 5월 인도 델리 근교의 소도시인 메루트에서 처음 봉기한 세포이들은 항명죄로 기소당해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동료 세포이들을 자극하여 대규모의 반란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민중들의 분노도 폭발하여 세포이와 연합해 델리를 장악했다. 이는 당시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90% 이상이 세포이 용병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무굴제국의 복권선언을 했다. 또한 여러 곳에서 옛 지배층과 규합하여 거점지역을 만들어 저항했다.
이에 영국군은 네팔용병인 구르카, 시크교도 들을 투입하고 본국의 증원군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무력진압하였다. 이 반란은 북인도 전역으로 번져 1859년까지 지속되었다.
[편집] 결과
반란은 체게적인 조직과 계획이 없었고 지도자들이었던 옛 봉건세력자들의 이권다툼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반란의 실패로 인해 무굴제국의 황제는 폐위되었고 무굴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지배가 아닌 대영 제국의 인도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되었고 인도 제국이 건국되었다.
영국은 이 반란으로 인해 인도에 대한 문화적 정책을 인도의 구제도와 관습을 존중하고 지배층과 타협하는 등의 회유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