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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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영어: World War I 월드 워 원)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 포고로 시작되어(근본적 원인은 사라예보 사건) 8월 1일에 이르면 독일 제국에 대러시아 선전 포고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전쟁이다. 이 전쟁은 대영 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으며 피해가 매우 극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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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배경
[편집] 경제적 배경
1871년부터 본격화된 국가들 사이의 산업·상업 반목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14년 독일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의 독일은 영국의 경제를 따라 잡아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고, 해운업 역시 다른 나라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본래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라이벌로, 양국은 모로코에서의 광산자원과 무역 기회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프랑스의 풍부한 철광산지인 로렌이 망하자 독일의 산업만이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과 오트만 제국에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이어서 이 지역을 일찌감치 탐내왔던 러시아와 충돌이 불가피 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부설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 철도의 부설은 보스포루스(Bosporus)에서 티그리스 강의 바그다드까지 이루는 노선으로, 이것은 다시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지고 있어 인도에까지 가는 단축노선을 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과 공동자본투자에 의해 실시하려 하였으나 양국간 각각의 이해관계에는 맞지 않아 거절하였고, 독일은 375마일 철도선을 강행하여 국제적 반목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편집] 정치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정치적 원인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자리잡았으나 점점 여러 가지 위험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대세르비아주의, 프랑스의 복수 범게르만주의었다.
오스트리아가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대세르비아 계획은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내의 슬라브족들을 선동하여 세르비아로 뭉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이중왕국에 반대하는 음모들이 일어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을 가져온 된 것이다. 범슬라브주의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의 감상적인 희망이며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 이중에서 러시아는 가장 강력한 슬라브국가로 발칸의 여러 민족들의 희망이 되었고 프랑스의 보복운동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그 전쟁의 패배를 보복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인 절대 다수의 의견은 아니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범독일운동은 1895년 창설된 범독일동맹의 이념에서 유래하였고 중앙유럽의 모든 게르만족들을 포괄하는 독일의 팽창을 모토로 한 독일제국을 주장하였다. 이 이념은 고조된 독일 민족주의의 한 형태로서 독일의 팽창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달랐다.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해외 진출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이를 조건으로 다른 열강들, 특히 영국과 관계를 원활히 하여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이 독일과 대립관계가 된 것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독일이 그와 상반되는 지속적인 해외 팽창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3제동맹(1873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터키영토문제로 독일·오스트리아와의 불편한 관계를 가지면서 3제동맹이 무산되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이탈리아를 다시 가입시킴으로써 3국동맹(the Triple Allance)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정책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변화를 맞는다. 영국과는 1차 및 2차 지중해 협약을 통해 이탈리아와 영국, 독일의 이익을 도모했지만, 요컨데 서로 이익을 놓고 타협하기 힘든 대립구도의 열강들을 억지로 화해시키고자 노력한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였다.
비스마르크의 은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전통적인 남진정책이 오스트리아와 일전이 불가피했다는 사실, 빌헬름 2세 등자 이후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독일로부터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러시아와 프랑스는 가까워졌다. 그 극적인 예가 프랑스의 군사 재정 지원이었다.
또한 영국은 파쇼다 사건과 모로코 분쟁 이후 독일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 독일의 대양함대 건설을 놓고 건함 경쟁에 들어가면서 위기감은 올라갔다. 결국 영국은 기존의 고립정책을 버리고, 프랑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이런 외교적 변화의 결과는 3국협상(the Triple Entente)의 결성이었다.
이렇게 1907년경 유럽의 강대국들은 3국동맹과 3국협상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고, 상호 동맹에 소속된 국가 간에 전쟁이나 분쟁이 발발하면 다른 모든 강대국들이 자동으로 말려들게 되어 있는 구조가 되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그만 불씨 하나로도 큰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불안한 상태였다. 여기에 사라예보 사건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을때 이탈리아는 3국 동맹을 탈퇴하고 중립을 유지했다가 1915년 삼국협상에 가담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포고하였다.
[편집] 외교적 배경
[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역사
[편집] 전쟁 발발 전
[편집]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가 다 된 시각, 세르비아 왕국 출신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1894년 ~ 1918년)가 사라예보에 친선 방문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독일어: Archduke Franz Ferdinand)과 그의 아내인 소피아를 암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에 대하여 세르비아 왕국에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을 왜 저질렀나"라고 말한 뒤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었다. 세르비아는 최후 통첩 거부하였으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7월 28일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되었다.
[편집] 동맹국, 연합국
- 이 문서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국가입니다.
세르비아는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 민족계의 나라 중 하나였는데, 이에 그들 중 리더 역할을 도맡았던 러시아 제국이 세르비아를 도와 이 전쟁에 참가한다.
이 때부터 전쟁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갔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국이었던 독일은 8월 1일 대러시아 선전 포고를 하고 8월 2일에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점령, 8월 3일에는 러시아와 동맹 관계였던 프랑스에 선전 포고한다.
그리고 8월 4일, 독일이 중립 국가인 벨기에에 선전 포고하고 점령하자 대영 제국이 이에 대응하여 독일에 선전 포고한다.
8월 5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하자, 8월 12일에는 영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한다.
11일 후,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이 국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를 하고 9월에는 "프랑스, 영국, 러시아 간의 동맹"이 성립하게 된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한 후 불과 2개월 만에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전쟁에 참여하는 세계 대전으로 발전 하게 된 것이다. 1914년 11월에 오스만 제국이, 1915년에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에,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동참하였으며 1916년에 루마니아 왕국이 연합국에 동참한다.
[편집] 동부 전선
독일과 러시아가 대치하게 된다.
[편집] 서부 전선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대치하게 된다.
[편집] 미국의 참전
미국은 전쟁 중 영국과 독일 간에서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계속적으로 "독일의 무차별 잠수함 공격에 대해서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독일은 이에 대해 이러한 공격을 중단할 것임을 몇 차례 약정했다.
그러나 1917년 2월, 독일의 외무 장관이었던 아서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 펠릭스 폰 에카르트에게 보냈던 암호 전문 치머만 전보)에서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할 경우, 멕시코가 1848년에 미국에 빼앗긴 모든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내용 때문에 미국은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얼마 후 독일이 유보트를 이용해 미국 상선을 공격하게 되자,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할것을 1917년 4월 6일 제의했다.
이는 미국 영토에 독일 공격에 대한 것에 한한다는 내용으로 하원 결의안 373-50, 상원 82-6으로 승인되었다. 12월에 이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에도 선전 포고한다.
[편집] 휴전
1917년, 미국이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1918년 중순 정도 되면, 동맹국들은 힘이 소진되기 시작한다. 결국, 1918년 9월 30일에는 불가리아가 처음으로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불가리아가 항복한 지 꼭 한 달 후에는 오스만 제국도 항복하였으며, 11월 3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항복하였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 독일에서는 수병 반란이 일어났다. 며칠이 지나자 독일 전체에서 노동자들 또한 군수품 생산에 지쳤다면서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베를린에서 친위대들과 실랑이를 벌였고, 11월 9일에는 황제인 빌헬름 2세가 퇴위하였다.
황제는 11월 10일,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같은 날, 독일에서는 공화국 정부가 세워졌다. 1918년 11월 11일 아침, 독일 제국도 연합국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약 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끝이 났다.
[편집] 전쟁 이후의 세계
영국,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일본은 오세아니아의 작은 섬들을 하나씩 차지하였다.
한편,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반성보다 지독한 가난과 연합국에 대한 보복에 시달렸으며 오스만 제국도 세브르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을 맺음으로써 지금의 영토로 고정되었고, 헝가리도 트리아농 조약으로 현재의 영토를 확정했다.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을 맺어 루마니아, 세르비아, 그리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할양하였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으나 그 이후에 많은 실직자가 생겨났고, 패전국인 독일에서는 감자 하나에 수십억 마르크로 값이 치솟았다. 중화민국은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 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연합국들은 패전국들의 식민지 일부를 프랑스는 레바논, 시리아, 기타 독일의 식민지(카메룬) 등을 차지했으며 영국 또한 요르단과 잔지바르 지역을 차지하였다. 타이는 입헌 군주국으로 발전하고, 중동 지역에도 오스만 제국과 싸운 댓가로 독립을 성취하였다.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북예멘 등을 꼽을 수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동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독립하였으며, 한국에서도 그것의 영향을 받아 3·1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을 조건으로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그 약속이 무산되자 지속적인 투쟁 운동을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1922년에 해체되어 1923년에는 지금의 터키로 바뀌었다
[편집] 연표
- 이 문서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 연표입니다.
[편집] 1차대전의 결과와 의의, 그리고 그 영향
-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선언하여 국제정치가 이념화, 도덕화하기 시작했다. 이상적 집단안전 보장정책인 국제 연맹을 통해 법률적, 도덕적 세계여론에 부응하여 평화를 구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 이 때부터 총력전의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특히 벨기에 왕국,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은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 이 때부터 기관총(영국), 독가스(독일 제국), 탱크(영국), 전투기(프랑스), 잠수함(독일), 곡사포(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의 신무기가 생겨 났다. 이탈리아 왕국은 세계 최초로 기관단총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 독일 국민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일방적 평화의 강요나 다름 없는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 조약은 아돌프 히틀러 집권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이 외부로부터 강요된 체제라고 하여 민주 정부에 대한 애정과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여 공화국의 생명력을 위태롭게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다.
- 이탈리아 왕국의 좌절감과 배신감은 파시즘의 발전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 미국은 초 강대국의 지위에 올랐으나,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연맹 참여를 거부하고 다시 고립주의에 빠짐으로써 강대국으로서 국제역할에 괴리를 가져왔다. 결국 경제 공황이 생겨 난다.
- 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하여 다른 국가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민족자결주의로 민족주의가 상승하여 20세기 정치의 중요한 요소로 된다(인도, 조선 등에서 독립 운동 활발).
- 일본 제국은 대체로 만족하였으며, 중화민국은 1917년에 참전(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산둥 반도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고 사인도 하지 않고 국제 회의장에서 철수한다. 이것은 5․4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 국제 정치라는 것이 이제는 유럽에만 힘을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전 세계가 국제 정치의 무대가 되었으며,국제정치가 좁은 유럽에서 벗어나 전세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전 세계 국민의 감시 속에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전 세계 지도자들이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도덕적으로 국제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편집] 사상자
- 이 문서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 사상자입니다.
참전 국가 중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의 사상자가 많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군기는 왕성하였으나 민족 문제 때문에 어떨 땐 패배하곤 했다(손실률도 상당했다).
[편집] 기술
제1차 세계 대전 중, 과학 기술은 독가스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냈다.
최초의 독가스는 독일군이 사용하였으며, 연합군측도 곧 비슷한 종류의 독가스로 대응했다. 독가스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양측 모두 방독면 외에는 없었다. 독가스가 사용된 것은 1914년 1차 마른 전투 이후 기관총, 철조망, 참호선으로 고착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서였다.
탱크도 이 참호선을 뚫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대포들도 점점 대구경화되었다. 장거리 사격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열차포도 등장하였다.
기술의 개선은 전방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생리대를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들 여성들을 위해 생리대가 개발된 것이다.
[편집] 언론
[편집] 명언
[편집] 참전 포스터
- 1915년 영국에 나온 포스터 둘 중 이런 말이 있었다.
- "지금 지원하라!"
- "정의의 칼을 들어라!"
- 오른쪽의 포스터는 역대 신병 모집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미국에서 발행된 것이다.
- "나는 네가 미 육군에 지원하길 바란다" 라고 미국의 상징인 엉클 샘은 말한다.
[편집] 참고 자료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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