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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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란 나라는 1871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한 통일로 처음 Deutschland라는 이름을 가진 단일 국가로 등장했다. 독일 민족은 존재했으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유럽처럼 다른 민족의 지배로 나라를 세우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민족의 제1제국이라 선언했던 신성 로마 제국이 있었지만, 그것은 빛좋은 개살구일 따름이었다. .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을 진정한 독일국가로 보기는 무리가 아닌가 싶다. 실제적인 국가로서 기능은 수행못하였으며, 각 제후국들이 주민들에게는 국가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중세 기독교 이념의 표현일 따름이었고, 진정한 독일 국가는 아니었다.
독일 국가의 시초는 프랑크 왕국이다. 샤를마뉴(독일식으로는 카알대제)대제가 죽은 후, 프랑크왕국은 3분되어 서프랑크, 동프랑크, 중프랑크로 흔히 부르는 3국가로 분할된다. 이 중 서프랑크는 오늘날의 프랑스, 중프랑크는 지금의 이탈리아, 동프랑크는 오늘날의 독일의 기원이다.
1871년까지 독일은 중앙집권화된 절대왕정이 들어서질 못하고 수십개의 연방제후국으로 부서져 존재해왔다. 이런 상황은 이미 중세초부터 진행이 되어왔으나, 결정적이었던 것은 종교개혁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래, 독일은 신교와 구교로 갈리어 싸우게 되었고, 그 와중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힘은 완전히 사라졌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분명 진보적인 것은 아니었다. 루터 자신은 보수파였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마른 짚단에 불과 화약을 던진 꼴로 농민반란을 유발하였다. 농민반란은 무참하게 실패로 돌아갔고, 영주들에 의한 철저한 반동체제와 재판농노제가 들어섰다. 이 재판농노제는 독일의 자본주의로 이행을 저지시키는 안전판 구실을 하였다. 재판농노제는 농업에서 봉건적 속박을 가져온 것 뿐만 아니라, 길드의 해체도 지연시켰다. 프로이센의 '위로부터 개혁'에 의해 강제조치로 영업자유령이 내려질때까지 독일의 길드는 막강한 힘을 지녔고,지금도 그 영향은 독일 산업에 끼치고 있다. -- 독일의 장인은 바로 이 길드, 독일어로는 Zunft의 전통이다.
서유럽은 17∼18세기에 시민혁명을 겪었다. 독일도 이 흐름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와 독일도 부르죠와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독일에서도 부르죠와들이 그 세력을 뻗기 시작한다. 산업화의 덕분으로 독일 역시 산업부르죠와들이 성장해간다.
부르조와 혁명은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길인 것인데, 독일에서는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의 부르죠와 혁명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해서 독일은 국가의 역활이 매우 강했다. 산업화가 위로부터, 국가에 의해 진행되었고, 보수적이고 봉건적 성격이 강했다.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독일의 부르죠와는 힘이 약했다. 민족국가 형성이 또한 늦었으며, 이 과업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1871년에 달성된다.
민족국가의 형성은 자본주의 발달에 매우 중요했다. 단일한 시장권의 통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독일은 1834년에 프로이센의 주도로 관세동맹을 맺어 이를 해결했고, 민족국가형성과 자본주의추구를 위해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포기한 나라였다. 이는 독일의 부르죠와지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혁명이후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었으나, 독일은 혁명이 실패한 탓에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지 않았다. 융커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은 부르죠와와 프롤레타리아를 동시에 억눌렀다. 독일에서 노동운동이 급격하게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성장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독일의 프롤레타리아는 독일의 부르죠와지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까지 한꺼번에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노동운동이 가장 빨리 성장했고, 다른 나라들보다 관심의 촛점이 되는 것이다. 산업화가 위로부터 시작되면서, 자본의 대규모집중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노동자들도 일찍 집중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이런 점에서 독일과 매우 흡사했다.
독일의 노동운동은 초기부터 급진적이었다. 초기부터 아우구스트 베벨의 지도하에 마르크스주의을 채택했던 것이다. 독일은 독일 사회민주당 세력이 강했고, 영국과 미국처럼 노동조합주의로 빠지지도 않았다. 독일의 노동운동의 특색은 사회주의+자본주의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초기의 급진주의가 수정주의로 흘러갔는데, 이것은 사회민주당의 내부상황과 외부상황, 즉, 비스마르크의 "사탕과 채찍" 정책에 기인한다.비스마르크는 사회민주당을 탄압하면서도 SPD의 의회진출을 허용했고, 또한 일찍 사회복지제도를 실시하여,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세력과 분리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1880년∼90년대에 들어서면 민족주의가 매우 강조되었다. 민족주의도 서구형과 동구형이 다르다. 동구형의 대표자는 독일이다. 동구형은 민족이란, 하나의 민족은 혈통에 의해 타고난 것이고, 공통의 언어, 문화, 역사를 공유한다고 믿는다. 서구형은 프랑스혁명이후 등장하는데, 천부인권설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일반의지를 강조하며, 국가란 사회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민족국가이고 대의제국가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문화를 타고난 민족이라고 믿었고, 세계민족에 문화전파의 사명을 가졌다고 믿었다. 이것이 훗날 히틀러의 과대망상의 씨앗이다.
이 민족주의는 SPD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공채발행 승인문제로 당이 두 쪽이 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흐트 뿐이었으나, 점차 이들은 동조자를 규합하여 SPD를 탈퇴하고 만다. 아무튼 독일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중적 사고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당시 독일노동자의 가정에 비스마르크와 마르크스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 독일의 산업발전은 눈부신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미 세계적인 공업국이 되어 있었는데, 미국의 자원보유고와 인구증가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독일이다. 독일의 산업발전이 영국과 프랑스를 추월한 것이다. 신산업혁명, 즉 전기산업과 화학산업에서 새로운 기술발명은 독일을 유럽 제 1의 산업국가로 올려놓았다. 독일은 지금도 유럽제1의 산업국가이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은 일시적으로 독일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SPD만 분열시켰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이란 국가와 독일민족을 이념에 따라 둘로 쪼개어 놓기도 했다.
쪼개진 두 개의 독일은 1990년 다시 통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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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중유럽의 원시사회
1907년 하이텔베르크인이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독일지역에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했었다는 실이 입증되었다. 중석기시대에 그들은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조개를 채집하기도 했으며, Sippe 씨족집단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신석기혁명의 여파는 독일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라이프찌히에서 신석기유뮬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이때부터 씨족중심의 원시사회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귀족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700년경 소아시아로부터 철이 들어왔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농업(사유재산과 일부일처제)과 목축업이 분업되었다. 이것이 제 1 차 분업이다. 수공업의 출현은 제2차 분업, 상업의 출현은 제3차 분업이다. 소아시아로부터 들어온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는데, 이때부터 전쟁으로 생긴 노예가 그 노동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노예가 로마 제국처럼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B.C 4세기∼3세기에 게르만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혈통적이라기 보다는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에 따른 복속과 통합과정으로 생겼다. 독일 민족은 처음 부족연맹체로서 등장했다. 바이에른족, 알레마넨족, 프랑켄족, 튀링겐족, 프리젠족, 작센족등, 동일한 부족에 속하는 사람들은 관습, 종교, 문화,법적 전통을 갖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혈족명으로 다른 부족과 구별하였다. 그러나, 초기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정확한 생성과 소멸은 잘 알 수가 없다. 한 부족과 다른 부족을 구분짓는 종족적 특징들이 반드시 지속되거나 제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족간 합병이나 분할도 빈번한 형편이었다. 이때 게르만 전사들은 귀족으로 발전하였다. 초기 게르만족에 대해서 그마나 알려주는 사료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일부 나와 있다.
Sippe를 중심으로 숲속에서 살았는데 토지는 공유제였다. 경작시 공동체구성원에게 평등하게 분할되었다. 성균관대학교의 정현백 교수는 이를 중세의 삼포제가 나타나는 계기로 보았다. 토지분할이 매해 일어나, 소유권은 영속적이지 않았다. 농업상의 필요에 의해 토지의 사유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지리적 조건 탓에 그들은 사냥과 목축업에 더 주력했던 것 같다. 마르크공동체에서 중요한 일은 민회에서 결정하였다. 이 민회는 무장전사들의 공동체였다. 이들은 원시공제와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독일 역사가들 중에는 이를 귀족사회라고 주장하는 파가 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를 보면, 이 때의 게르만족 모습이 잘 나와 있다. 북동부의 게르만족은 민회대신에 "제사장-왕"의 지위가 있었다. 민회는 서부 게르만족의 것이었다. 그들은 평시에는 공동의 행정기관이 없었으며, 전시에 지도자가 선출되기는 했으나, 제도화된 힘은 아니었다. 아무튼, 고대 게르만사회에서 중요한 계층은 농민전사층이었다. 귀족계급도 "요청에 따른 복종"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귀족계급형성은 로마 제국 멸망이후이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라인강을 중심으로 로마인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게르만족을 정복하려고 했으나, 토이토부르거숲의 전투에서 대패한 뒤로는 라인강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의 라인강진출은 게르만족에게 앞선 로마문명을 전달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라인강주변의 본, 트리에, 마인쯔, 쾰른등지에는 로마군이 주둔했으며, 저 유명한 군용도로가 건설되었다(정확하게는 로마군이 군단 기지로 건설했던 것이 도시로 발전하였다). 게르만족은 조금씩 로마군에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제국말기에 이르면, 게르만족 전사들은 점차 대규모로 로마군에 입대하게 된다. 심지어 부족전체가 로마군으로 입대하는 사례가 발견되기까지 한다. 로마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자 그들은 로마군의 장비와 생산도구들을 불하받아, 급속히 귀족계급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씨족적인 귀족이었다.
클로드비히가 498년,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프랑크족의 귀족들은 초기의 봉건적인 귀족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거의 비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서유럽이나 남유럽에서 노예제 단계를 거쳐 봉건적 귀족계급이 형성된 것에 비추어보면, 고전적(그리스-로마적인) 노예제도 없이 바로 봉건귀족으로 전환한 것이다. 아무튼 5c∼6세기에 프랑크족에 의해 봉건적인 국가가 구성되었으며, 다른 게르만족 국가들과는 달리, 성공적으로 살아남아 이후 유럽역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때 프랑크족은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또한 정복지인 고올지방(지금의 프랑스)의 원주민들(갈리아인들과 로마인)의 지지와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다른 게르만족들이 세운 국가들과 달리 프랑크 왕국이 오래 살아남고, 또한 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인 것이다.
751년, 피핀이 교황의 지원을 배경으로 프랑크왕으로 등장하였는데(카롤링거 왕조의 시작), 이때 피핀이 기증한 중부 이탈리아가 훗날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 이 피핀의 아들이 유명한 카알대제(프랑스어로는 샤를르마뉴), 카알대제는 도나우 강변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이곳에 "오스트마르크(Ostmrak)"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의 기원이다. 카알대제는 자신이 새로 획득한 변방지대에 "마르크(Mark)"를 설치해 나갔다. 카알대제는 구서로마제국의 유럽내의 대부분의 영토를 획득했고, 이로써 로마교황으로부터 "서로마제국황제"의 관을 얻었다. 이것은 로마교황의 동방 그리스정교와 갈등관계속에서 든든한 후원자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 카알은 성문법을 만들고, 문법을 정리하기도 했다. 카알대제는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였다. 강력한 행정질서를 갖춘 중앙집권국가를 추구하였으나, 실제로는 국가연맹적 성격이 강했으며, 그 힘은 그리 센 것이 아니었다.
카알에 의해 봉건제의 기초는 닦였다. 주군과 봉신의 개념이다. 사실상 이것은 이전부터 진행해오던 경향을 제도화시켰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카알이 이때 정복한 작센은 뒤에 독일 국가 형성초기에 기여했다. 재미있는 것은 카알은 왕궁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토지소유에 기반을 둔 황제는 아니었다. 카알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3분되었으며,서프랑크는 오늘날의 프랑스, 중프랑크는 지금의 이탈리아, 동프랑크는 지금의 독일의 기원이 되었다.
진정한 독일사는 843년, 프랑크왕국의 삼분이후부터 시작된다.
[편집] 독일 국가의 시초
919년에 작센의 하인리히공작이 독일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많은 가신을 보유하고 있었다. 헝가리와 상대로 전쟁을 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며, 928∼929년에 슬라브(폴란드)를 공격했다. 그는 헝가리에 대한 곡물납부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가 하인리히1세이며, 그의 아들이 오토대제이다.
오토대제는 재차 침입해온 헝가리군을 완전히 물리치고 독일 국가권력의 강화를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국가교회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주교와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하고 성직자들에게 세속적인 관직을, 즉 봉건영주의 작위를 수여하면서 주교령에 대한 왕의 보호를 약속한다. 왕과 성직자의 이러한 결속은 봉건영주들과 정치적 균형을 가져와 왕권이 강화되었다. 오토는 곧 북이태리를 점령했으며(이후 북이태리는 독일왕들, 즉 신성로마제국의 끊임없는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 교황으로부터 황제(신성로마제국)의 칭호를 받게 된다. 황제는 로마교회를 보호하며, 그 대신 교황은 황제가 보유한 이태리내의 영토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독일사에 있어서 숙명적인 비극이 된다.
이 이태리문제는 독일내에 황제국가건설에 반작용역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왕들, 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독일국내의 문제보다는 이태리문제에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됨으로써 스스로 왕권약화를 초래하게 된것이다. 한편, 슬라브족의 땅을 점령하면 Markgraf라는 공작들을 점령지역(Mark라 호칭함)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오스트리아도 Ostmark라는 변경의 한 주였다. 이들 슬라브지역은 점령되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고, 다시 독일이 이들을 점령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Mark는 훗날 프로이센이 되었으며, 뮌헨주변은 훗날 오스트리아로 발전한다.
교황은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 자칭하고 있었고, 주교임명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황제는 스스로 세속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황제는 독일국가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황제의 서임권은 강력한 황제권의 밑받침이었던 것이다. 그걸 내놓을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은 달랐다. 11세기무렵의 교황들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클리뉘수도원을 중심으로한 개혁운동을 이끌던 이상주의자들이었다. 매우 이상적인 개혁주의자들이었다. 성직자들의 임명권(서임권)을 왜 세속군주가 갖고 있는 지에 대해 그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교황은 당연히 서임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고 나섰고, 세속군주로서는 그것을 교황에게 돌려줄 수 없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이른바 서임권투쟁(the Investiture Contest)이다.
고조되어 가던 교속의 갈등은 결국 하인리히4세(독일황제)와 그레고리7세(교황) 때에 폭발한다. 이것이 1077년에 발생한 저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다. 반황제적인 독일국내의 귀족들이 교황과 결탁하였고, 교황은 서임권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도시민들의 지원을 받았으나, 안팎에서 공격을 받게된 하인리히4세는 결국 카놋사에서 굴욕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몇년후 하인리히4세는 그레고리를 병사시킴으로써 멋지게 복수했다). 이 사건의 본질은 교황과 세속군주간의 서임권 관할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중앙집권(황제)와 지방분권(귀족)의 대립이며, 신정정치체제와 세속군주정간의 권력쟁탈전이다. 두 가지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것이 '서임권투쟁(the InvestitureContest)' 이다.
1095년 교황 우르반2세의 거짓말(기독교인 순례자의 피살)로 십자군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서임권투쟁이후의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중앙집권적 권력을 일시적으로나마 강화한 국왕이 프리드리히1세였는데, 그도 십자군전쟁에 참여한다. 물론 아시아엔 가보지도 못한채 죽었지만. 이 점을 봐선 이때 십자군운동은 거의 현대 올림픽과 유사하다. 참가에 그 의의가 있으며 명예가 있다면서 실은 그 뒤로는 물질적 이익을 추구한 면에서는.
십자군운동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그렇게 자세히 언급할 틈은 없으나,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십자군운동은 사실상 세속적 동기가 더 강한 운동이었으며, ① 봉건적 세력황작의 욕구,② 모험심, ③ 봉건제 사회내부의 심화된 위기를 외부로 돌리려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십자군원정은 아무튼 동양문물을 들여온 이외에 Orient와 접촉은 독일의 기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른 나라 기사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그들의 세계관이 변하기 시작했으며, 문화의 주체로 나섰다. 기사들이 문화의 주체로 나서면서 나타난 문학이 궁정문학이다. 이르반 Minnesang이란 것이다. 주군에 대한 사랑과 서정시가 결합된 그런 형태인데, 독일적인 민족의식을 낳게 하는데 기여했다.
독일에도 시장이 나타났으며, 수공업이 조금씩 발전하기 시작했다. 카롤링거시대에 교역장소는 고작 60∼70여개 였으나, 11세기초에는 라인강과 엘베강근처에 200∼300여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도시들이 생겼다. 왕과 귀족사이에는 항구적인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도시가 제3의 세력으로서 중요해졌다. 이들은 도시 공동체 commune을 형성하였다. 시장은 단순한 물물교환의 장이었으며, 원거리무역시 쉬어가는 곳에 불과했다. 이러한 지역은 강하류에 발달했고, 영주들에 장악되어 있었다. 도시들이 생겼다. 도시는 봉건적 종속이 약해지고 있었으며, 시민적 도시공동체(commune)을 형성하게 되었다.
11세기에 봉건적 성은 방어시설로서 지배계급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건설된 것이었다. 성과 성(burg)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피처였으나, 점차 벙어와 거주가 그 주 목적으로 되었다. 성의 재료도 흙과 나무에서 점차 돌로 바뀌어 갔다.
7인의 선제후에 의해 황제가 선출되기에 이르렀다.이들은 3인의 성직자와 4명의 세속제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에 의해 황제가 선출되므로, 황제는 점점 자신의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12세기에 이르르면 인구 10만이 넘는 도시가 나타났는데, 파리와 베니스등, 2,3개뿐이었다. 자치도시의 중심은 도시귀족들이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플로렌스의 메디치가). 흥미로운 것은 자치도시가 고도로 발달한 이태리와 독일은 자본주의로 발전이 오히려 늦었다는 점이다. 상업의 발달이 자본주의로 이행을 가져왔다는 학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 독일 자치도시의 강력함은 한자동맹으로 대표될 것이다. 12세기말에 이르르면 영방제후들이 조세권을 도시에 넘겨주기에 이르렀다.
14세기에 룩셈부르크왕조가 침략(對폴란드,對헝가리)전쟁을 자주하다가 황제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4세기이래로 제국황제의 대립은 심화되었으며, 15세기에는 연방국가가 형성되었다. 급료를 받는 직업관리와 법률가가 등장하여 각 개별 영방국가는 권한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제국 자체는 그러지 못했다. 1413년에 Brandenburgmark의 Hohenzollen가가 기사반란을 진압하면서 지역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1442년에는 베를린과 쾰른을 장악하였다.
1437년에는 룩셈부르크왕가가가 Hapsburg왕조로 넘어갔다(알브레히트2세).합스부르크왕조는 1806년까지 이 종이호랑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자동맹은 귀족에 저항하면서 도시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3세기말 한자동맹은 상인한자에서 출발했다가, 도시동맹으로 발전했다. 한자동맹의 핵심은 뤼벡지역으로 노르웨이를 상대로 무역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강한 나라였다. 봉건성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며, 다른 한편으로 플라등르에서 이미 발달한 면공업과 일정한 연관을 맺으며 발달하였다. 자본주의적 관계발전에 진보적 역할을 했다. 이 당시 영국에는 아직 상인계급이 없었다. 한자동맹의 발전은 강력한 경쟁자가 없었기에가능했던 것이다. 한자동맹의 진보적 성격은 14세기까지만 이어졌다.
※ 독일의 한자동맹은 왜 자본주의이행에 실패했는가? 한자동맹은 북유럽 상업을 독점(상업적 이익)했으나, 이를 생산으로 전화하지 않고 직접생산자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하였다. 소수의 도시귀족이 도시자치회의를 장악하여 중소상인을 희생시킨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도시귀족의 전횡)
이러한 전횡-독점적 권력의 행사-은 도시시민(부르죠아)의 성장을 방해하였다. 이들은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벨기에 내덜란드지역의 무역발달로 점차 침체되기 시작했다. 영국, 네덜란드상인과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Hohenzollen家가 베를린과 쾰른을 통합하면서 한자동맹으로부터 탈퇴를 강요했고, 이들이 탈퇴하면서 한자동맹은 더욱 쇠약해져갔다. 1494년 러시아가 통일되었다. 러시아는 북해연안의 상업권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도 한자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 1669년, 결국 한자동맹은 해산하게 된다. 농민전쟁 실패후, 농노제강화도 한 이유라 할 수 있다(하지만 그 이름은 아직 남아 있다. 독일 국적 항공사인 '루프트한자'다)
[편집] 연방국가적 절대주의(Territorial Staatlicher Absolutismus)
절대주의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이다.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고 지위가 지방분권적 봉건제보다, 절대적으로 높아진 체제를 의미한다. 이념적으로는 왕권신수설(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주장)에 기인한 체제이다. 르네상스와 신항로의 발견, 종교개혁시대를 거친 뒤에 등장했다(16c∼18c).
처음에 에스뺘냐와 포루투칼에서 등장했으며,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루이 14세때 절정), 영국(입헌군주등장이 특색),프로이센을 거쳐 마지막으로 러시아에서 18세기에 계몽절대주의라는 기묘한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멕시코로부터 엄청난 부를 얻어들였지만, 이를 자본주의적으로 운영할 정치적/경제적 세력이 없어서 실패하게 되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스페인의 초기 부르죠와와 귀족들은 자본주의적 재생산에 식민지로부터 벌어들인 '자본'을 투자하기보다 사치생활에 더욱 연연하였고, 자본주의적 구조가 취약한 당시 스페인은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후주1).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경우, 교육과 사회체제를 자본주의적 구조에 맞게 변형함으로써 자본주의로 이행에 성공적으로 적응한다.
절대주의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다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세시대 있으나마나였던 국왕의 권력이 말그대로 '절대적'으로 강화된다. 그 이전에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던 지방의 대영주들은 그들의 권력을 잃어가면서 점점 국왕에게 의존하게 된다.
둘째, 무기와 전쟁방법의 발달로 새로운 상비군제도가 등장한다. 이 시기 상비군은 용병제도에 기초를 두고 있다. 대포, 화약, 소총이 발명되고, 이들 무기가 실용화되면서 실전에 도입되는 전술변화는 중세시대무력의 핵이었던 기사집단을 쇠퇴시키고 직업군(상비군)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하였다. 군대의 주력도 기병에서 보병으로 바뀌게 된다.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어 지난날의 영화를 잃게 된 고급귀족들은 상급장교로, 기사들은 하급장교로 전환하였다고 추정된다. 프로이센에서는 이런 이들이 후에 Junker라 불리우는 동부 토지 귀족과 군국주의 체제의 중요한 밑받침인 장교단을 형성한다.
셋째, 전문관료제의 출현이다. 중앙집권화된 국가는 반드시 전문 관료를 필요하게 되고, 관료제도가 출현하게 된다. 그 이전에 전문관료제라고 부를 수 있는 제도는 없었다. 국왕은 이제 지방에 국왕의 직속관료를 파견하면서, 직접 왕을 위한 세금을 걷었다. 그러나, 영주들의 세금도 여전히 남아있어서, 이제 농민들은 왕과 영주에 대한 이중과세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프랑스혁명때 프랑스농민들은 과중한 세부담에 혁명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다. 이제 영주들은 왕에게 투항하여 왕의 권력 밑에서 그 특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정현백선생은 농민 소요가 절대주의국가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언급한다. 이제 봉건적 요소가 서서히 끝나가고 近代가 서서히 시작되는 시기로 이 때를 잡는다.
네째, 중상주의정책이다. 수출을 장려하면서 수입을 크게 억제하여 국부를 증대하고자 하는 정책인데, 훗날 Adam Smith가 공격대상으로 삼았던 국가의 통제가 철저하게 모든 부문에 개입되었다. 아직 절대주의시대에 부르죠와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적으로 세력을 잡지못하고 있었다. 주로 이들은 원거리무역으로 돈을 번 대상인이나, 금융업자들인데, 왕권과 결탁하여 절대주의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영국의 경우 메뉴팩처 중심의 자본주의성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대륙의 경우에는 계속적인 봉건적 절대주의가 지배적이었다.
절대주의는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는데, 독일의 절대주의는 봉건국가의 최고이자 최후의 형태로서 기형적으로 왜곡되어 발달하였다. 1648∼1789년 까지 독일 특유의 형태로 절대주의가 발달하였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소상품생산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메뉴팩처적인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분산된 메뉴팩처가 등장하였다.
18세기초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왕가의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스페인왕위계승전쟁 등 숱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쟁의 결과는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확장이었다. 이때에 오스트리아는 중앙관료체제가 성립되었고,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오스트리아의 예술과 문화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선제후 Friedrich Wilhelm I를 중심으로 Hohenzollen家가 Brandenburg-Mark를 중심으로 서서히 발달한다. 이 나라가 바로 훗날 군국주의의 대명사로 19세기 독일사를 주도해나간 프로이센왕국이다.
1618년에 독일기사단이 개척한 땅인 프로이센을Hohenzollen家가 상속하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되었다. 왕국의 호칭을 획득한 것은 1701년의 일이다. 1653년에 상비군설치의 댓가로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1640∼1688)는 융커들에게 무관세정책을 취해주었고, 동프로이센의 대지주인 융커(Junker)들은 곡물무역을 독점하면서 상업 부르죠와의 성장을 방해해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발달에 장애를 가져왔고, 융커들은 정치권력마저 장악하면서 19세기 중반에 부르죠와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게 된다(이것에 대해서는 후술).
선제후 Friedrich Wilhelm는 30년전쟁의 피해복구에 주력하면서 절대왕정체제를 수립하여 프로이센흥기의 기반을 닦았다. 프로이센이 강대국으로 도약한 것은 Friedrich Wilhelm I(1713∼1740)와 그의 아들 Friedrich II(1740∼1786)때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프로이센은 1701년에 합스부르크왕가의 동의를 받아 선제후에서 프로이센왕으로 승격한다. 첫 국왕이 Friedrich I이다. 점점 독일은 프로이센(Hohenzollen)과 오스트리아(Habsburg)로 이원화되어갔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 대해 공세적으로 되어간다. 국제무대에서 위치를 강화하고자 절치부심이었던 프로이센은 강대국간 갈등이 있을때마다 개입하였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7년전쟁(1756∼1763)에 개입하면서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도약하게 된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2세는 7년전쟁이 끝난 후, 중상주의정책 등으로 국가부흥에 힘썼으며, 행정말단까지 군주1인이 지배하는 군국주의적 관료제적 절대왕정을 수립하였다. 그는 오직 토지귀족층인 Junker를 국가의 근간이라고 생각하고 농노(Leibeigene)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반면, 중산층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하였다. 군국주의적 절대왕정 체제하에서 프리드리히2세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나 메뉴팩처는 주로 국가가 소유했다(후주2).
이 메뉴팩처들은 서서히 사적 자본으로 넘어갔으나 프로이센의 자본주의는 아직 봉건적인 유제들에 묶여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의 국가이성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국가의 우위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770년대 말부터 부르죠와와 귀족사이에 세력판도의 변화가 일어났다. 군국주의 전통아래 국가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 사조의 책생산이 증가하면서 부르죠와 독서층이 형성되었다.
이제 새로운 이른바 "질풍노도의 시대(Sturm und Drang)"가 몰아닥쳤고, 본질적으로 부르죠와적 자유를 원하는 계몽작품들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 Kant, Herder가 활약한다. 1737년엔 괴팅겐대학이 설립되었는데, 이 대학이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도입의 단초라 여겨지고 있다. 괴팅겐대학이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난 최초의 대학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역사학 연구는 전통적 보수주의 역사에서 벗어나 보조과학을 이용하면서 광범한 역사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7년전쟁이 끝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실레지엔을 상실하였으나, 여전히 중부유럽의 강대국으로 남아있었다. 영토는 광대했으나, 오스트리아는 다민족국가여서 한 국가로서 견고한 통일성이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개혁을 시도한 군주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인 Josep II이다. 1780년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면서 요세프 2세는 계몽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은 개혁을 추구하였다. 농노해방, 사형과 고문의 폐지, 교육의 보급등 많은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개혁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반대에 봉착하여 실패하고, 전인구의 1/4에 불과한 독일인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화정책은 타민족들의 반항에 봉착하여 실패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을 작성하였다. "가장 훌륭한 의도를 가졌으나, 하려고 한 모든 일에 성공하지 못한 요세2세가 잠들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계몽전제군주(啓蒙專制君主)라고 부르고 있다.
[편집] 초기 부르죠와 혁명 : 16세기∼30년전쟁
[편집] 16세기초 독일의 전환기
15,16세기부터 프랑스혁명때까지는이른바 manufacture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이다. 이 때의 주요한 산업형태는 우리가 이른바 "선대제(putting-out-system;Verlag)"이라고 부르는 체제이다. 선대제는 원거리무역으로 갑부가 된 상인이 직접 생산에 관여하는 체제로 상인이 수공업자에게 원료와 자금을 제공하며, 생산도구는 노동자가 소유한채, 노동자가 상인에게 약속한 물품을 넘기는 방식이다. 16세기초 생산력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주석/구리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제련소.제철소.섬유생산이 늘어났다. 생산수단과 부를 축적한 부르죠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이다.
농업에서도 자연경제중심체제가 뚜렷하게 화폐경제로 이행하기 시작했고(화폐지대의 출현), 부유한 농민층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토지에 목을 매달고 살던 기사와 하급귀족들이 몰락,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사와 하급귀족중 일부는 근대적 관료로 전환하기 시작했다(아무튼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때의 독일에서 성직자수는 계속 증가했는데, 이는 독일이 로마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며,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시작된 (반교황/반로마의 감정) 배경을 이루게 된다.
16세기에는 합스부르크왕가의 권력이 확장된 시기였다. 그들의 권력확장은 주로 전쟁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결혼과 외교에 의존한 확이었다. 보헤미아/헝가리/독일전지역/스페인 등이 합스부르크로 편입되었다(이 시기 합스부르크의 몰락과정등은 폴 케네디著 "강대국의 흥망"에 잘 나와 있다).
초기 부르죠와 혁명의 단초는 이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술과 문예에 치중한 편이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다른,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으로 대표되는 북방르네상스이다.
[편집] 종교개혁
루터는 전혀 진보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개혁을 보수적 개혁이라고 한다. 카톨릭에서 보면, 전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르네상스는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은 굉장했으나, 실제론 몇몇 지식인과 예술가 집단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보수적인 행동으로 시작되기는 했어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황 레오10세는 성베드로 사원(현재 바티칸에 있는 교황청이자 관광명소)의 건축을 위해 푸거가에 엄청난 돈을 빌렸었다. 스페인 카를로스5세도 신성로마제국황제 입후보를 위해 역시 푸거가로부터 돈을 빌렸으나, 돈은 곧 떨어졌고 모잘랐다. 빚도 갚아야 했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면죄부 판매였다. 특히 면죄부는 독일에 집중적으로 팔렸는데, 성직자가 많았다는 것 외에도 이를 제어할 중앙권려기 없었다는 점도 주요한 요인이었다.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확립되가던 영국이나 프랑스에는 팔지 못했다.
1517년, Martin Luther가 Witeemburg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독일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루터는 인간은 내면적인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세초기의 순수 기독교 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의 행위는 훗날의 역사가가 표현한대로 "빠작 마른 짚단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158년에 루터는 소환되었고, 1519년에는 에쿠라는 신학자와 토론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와 결별할 생각을 루터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 토론에서 패배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순수한 기독교'사회건설을 위해서는 로마와 결별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레오10세는 1521년에 드디어 루터를 파문하게 된다. 그러나, 작센공인 Friedrich the wise가 마틴 루터를 숨겨준다. 루터는 이때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다. 이 번역은 역사상 최초의 모국어성서로서 독일어의 문법확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마치 세익스피어의 문학이 영어의 확립에 기여한 것처럼). 대중이 성서와 문자를 인식하게 되면서, 독일의 민족주의 형성에 이바지하게 된다. 근대적 자본주의이행에 나타나는 사상의 단초는 이때부터 형성된다. 루터의 사상은 신앙에 의한 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 신앙에 의한 구원으로집약되며, "성서는 모든 대중이 읽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반대중이 성직자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신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근대적 개인주의사상이 자라기 시작했다(이것에 관해서는 Erich Fromm의"Escape from Freedom"의 제3장을 보라).
이 무렵부터 독일에는 3가지 집단이 등장한다. 새로이 등장하는 중소 상공업자를 대변하는 집단과 교황권의 약화로 수많은 수도원의 토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보다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고자하는 대제후들 (루터를 보호한 작센공도 이런 경우다) 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보수적인 카톨릭세력 현상유지를 원하는 세력 - 성직 및 제후들, 고급성직자, 도시의 도시, 귀족들, 부유한 상층귀족들
- 도시시민적 개혁집단(protestant) - 서서히 상공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시민들. 하층 귀족들, 신성로마제국으로 독립과 수도원재산에 관심있는 제후들등이다. 앞서 언급한 작센공도 이 경우이다. 1522년에는 루터에 자극받은 이들 기사단이 슈말칼덴 동맹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화약무기와 총포류의 발달로 기사의 존재 가치가 사라져가던 때라 발악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 혁명적 집단 - 일체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농노, 농민, 일일노동자, 룸펜프롤레타리아, journeymen(길드에서 마스터가 되지 못한 자들)등이다. 1524∼1525년의 농민전쟁을 주도한 그룹이다. 이들은 민중설을 설교하는 토마스 뮌쩌의 사상에 더 감염된 집단이다. 루터의 개혁이 정통/귀족적 개혁이라면, 토마스 뮌쩌 중심의 농민반란은 민중적/과격/급진적 종교개혁이다.
[편집] 마틴 루터의 사상 --- 신앙을 통한 의인화
농민반란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루터와 뮌쩌의 사상을 비교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루터부터 정리를 해보자.
루터는 신앙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카톨릭에서처럼 교회와 성직자가 매개체가 아니라, 오직 성서만이 구원이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루터는 로마교황파("악마적 지배자다"), 제후영주(그들의 사치와 향락을 비판), 농민("당국이 사악하고 부정한 것이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되지 않는다. 악을 벌할 권한은 칼을 차고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의 권한이다. 신에 의하지 않는 권력은 없고, 권력에 반하는 것은 신에 반하는 것이다" : 매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14세기 중엽의 마르실리우스나 동시대의 마키아벨리와 매우 대조적이다)모두에 경고를 발했다. 루터는 영주들에게 또한 농민들을 "미친 개잡듯이" 때려잡으라고 영주에게 충고하기를 아끼지 않았다.1525년에는 농민반란이 진압되었고, 뮌쩌는 처형당하지만, 이후 독일은 신구교 제후들간 30년간 종교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들의 종교전쟁은 1555년 아우구스부르 종교화의로 일단락짓게 된다. 서로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며(제후중심으로), 한 지역의 종교는 그 영방을 다스리는 지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화의의 중심이다. 독일의 교회가 국가 중심의 국가 교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게 된다. 마틴 루터의 사상은, 비록 보수적이기는 했으나, 많은 분파를 낳았다. 중도파에는 제네바의 칼뱅파, 영국의 퓨리탄(미국의 청교도로 이어짐), 프랑스의 위그노등이 있으며, 우파는 영국성공회, 좌파로는 재세례파, 퀘이커, Diggers, Levellers등이 생겨났다.
마틴 루터의 경제사상은 독일의 민족주의를 대두시켰고, 개인주의를 정착시켰다. 직업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여기에 힘쓰는 것이 신의 계시라고 설파했다. 그의 직업사상은 소명의식, 과업의식으로 집약된다.
루터는 근검을 생활원칙으로 하는 상공업자의 역할을 정당화했으며, 이는 칼뱅에 의해 정리된다.루터의 직업윤리는 현실직업에 성실한 것이 도덕적인 실천내용의 최고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정신과 프로테스탄트윤리}의 저자 막스 베버는 이른바 세속적 향략을 배척하고 합리적인 이윤의 획득을 소명으로 삼고 그것을 조직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형태를 "자본주의정신"이라 칭한바 있다. 이것이 서양근대에 나타난 자본주의정신이며, 그 계기를 신교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엄격한 시민적인 생활관과 윤리관을 지닌 부단히 향상하려는 중산계급에 의해 창조된 정신이다. 금욕,절제,근면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이는 시민적인 직업관이 되었다. 캘빈은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한 인물인데, "예정설",즉"신이 어떤 인간을 은총적으로 예정했다. 이 증거는 세속생활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에 의해 나타난다."라고 주장했다. 루터에서 캘빈으로 이어진 이러한 사상은 종교가 영리활동을 합리화/정당화 해놓은 것이었던 반면, 현 세계의 재산불평등과 차별을 신의 섭리로 돌리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였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Weber의 주장대로라면) 캘빈을 거쳐서 자본주의정신으로 이어진 직업의식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기도 하나, 동시에 농민적 생활을 찬양하면서 상업과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중세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불평등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며, 농노제는 사회에 필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없이는 건설할수 없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루터는 아직 중세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타락상을 극복하기 위해 초기 기독교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그는 권위에 반발한 것이 아니라 권위가 이완되는 것을 반발한 것이다.
R.H.Tawney가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한길사에서 번역출간)}을 냈는데, 그는 이 책에서 Weber의 {자본주의정신과 프로테스탄트윤리}를 전면 비판하고 있다. 루터,켈빈등의 Purtitanism은 결코 근대적이 않았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정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프로테스탄트가 자기적응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일으키는데 프로테스탄트윤리가 강장제역활을 했으나, 결정적인 역활은 하지 않았다고 토니는 주장하고 있다.
[편집] Luther와 농민들의 생각의 차이
Luther는 순수한 종교적 입장에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이었지, 개혁가나 혁명가적 입장에서 반박문을 발표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교의적·성서적·신학적 측면에서 면죄부 판매의 모순점을 지적하며 이의 시정을 요구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회 경제적 입장에서 자신들에 대한 로마교황의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Luther의 종교개혁을 해방운동과 결부시키게 된다.
정통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벗어나, 교황권이나 교회의 계층제 자체를 비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상의 차이는 훗날 농민전쟁이 일어났을때, Luther가 농민들을 두고 "폭도"라고 불렀던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Luther는, 인간의 구제는 카톨릭교회가 명한 은층을 획득하기 위한 외적행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의 무한한 사랑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의식적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 신앙을 더 중요시하였다(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져야함).반교황파의 인문주의자들이 Luther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개혁은 속도가 빨라졌으며 Luther는 독일국민의 영웅이 되었다.그는 이제 종교개혁의 강령이랄 수 있는 세가지 논문을 발표한다.
- 독일국민의 기독교적 귀족에 대한 호소 ; Luther의 종교개혁의 발전에 결정적 중요성을 지님.
- 교회의 바빌론유수
- 기독교인의 자유 : 세속적 권력으로서 교회권력부정(중세적 사상) 영방군주와 결탁, 영방군주에 귀속,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영방군주에게 얽혀 매임. 국민적 영웅에서 이기적 권력정책의 도구가 됨. 점점 독일농민들과 멀어지게 된다.("정치세력과 종교개혁의 결탁")
『기독교인의 자유』에 나타나는 두 가지 모순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에 종사하는 하복으로 누구에게나 종속한다." 이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을 한편으로는 영적 정신적 존재로 내적 인간이라는 의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 육체적 외적 인간이라는 의미, 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이원적 인간관"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자유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외적 행위로써가 아니라 내적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때문에 국민의 영웅으로서 추앙받는 면과 정치적 도구화라는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루터의 보수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편집] 토마스 뮌쩌의 사상
1850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저서 《독일농민전쟁 (Der deutsche Bauern Krieg)》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는 봉기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모든 농민은 경제적 요소에 의해 봉기했다.", "기독교의 외투를 걸친 무신론자에 불과하다.","최초의 영웅적인 공산주의자이나, 동시에 비극의 영웅이다. 아직 부르죠와혁명이 막 시작될려는 시대에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라고 말한 바 있다.
엥겔스가 언급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토마스 뮌쩌이다. 독일농민전쟁의 지도자 토마스 뮌쩌는 재세례파(태어나자마자 받는 세례부정, 내면적 계시주장)의 지도자였다. 그가 직접적 사회개혁을 처음부터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종교적 개혁이었으나, 후에 정치개혁을 하게 된다 종교를 매개로 근대화 운동을 펼친 것이다. 루터가 이를 "난동"으로, 농민들을 "폭도"로 매도한 이후 루터와 뮌쩌는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뮌쩌는 "무식해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성서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에 신이 나타난다.", "죽은 글자가 아닌 순수한 사고"를 주장했다. 성서는 외부적인 것이고 교육적인 가치를 가진 오랜 역사의 기록일 뿐이라는 것이다(실제로 구약성서는 유태인의 역사서임).성령은 복잡한 이성에 왜곡받지 않는 순수한 사고에 나타난다. 성령이 나타나면 인간은 성령의 내적 고민을 통해 '고난'을 겪게 된다. 성령->공포/혼란(고난의 단계)->자기 포기역사의 종말론적 단계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참신자는 무력을 사용하고 불신자를 제거, 참신자로 이루어진 동맹(선민동맹)이 무력사용으로 불신자를 처벌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다는 것이다. 그는 루터의 사상을 "문자주의 신앙"이라 비판했고, 민중을 역사의 객체(신의 은총을 받기만 하는 사람)로 본다고 비판했다. 뮌쩌는 민중을 행동의 주체로, 농노제를 부정하고, 교황제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편집] 독일 농민전쟁 : 1524∼1525년
[편집] 연구사
독일 농민전쟁에 대한 연구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익과 좌익, 그리고 중도적 해석이다. 우익은 정치적 해석이 주가 되는 것으로 농민봉기의 원인을 연방군주권력과 농민공동체권력간의 정치적 대립에서 찾고 있다. 농민은 관습법(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에 연연하는 데 비해, 영주계급은 로마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복음을 새롭게 해석한 농민들이 법적 관계를 둘러싸고 영주계급과 충돌을 빚은 것이 1525년 농민봉기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좌익적 해석은 마르크스주의 해석이다. 그들은 1525년 독일농민전쟁을 초기 부르죠와혁명으로 파악한다. 당시 독일은 아직 부르죠와혁명이 수행될만한 생산력은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부르죠와가 아직 미성숙하므로 농민층의 힘을 빌어 부르죠와혁명을 수행하려 했다는 것이다.엥겔스는 종교개혁이 부르죠와혁명의 첫번재 시작이고 그 와중에 농민전쟁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근데 뒤에 살펴보면 알겠지만, 독일의 부르죠와는 다른 나라의 부르죠와보다 그 힘이 약했다. 차차 살펴보게 될 것이다).
중도적 해석가들은 사회사가들이다. 농민전쟁을 부농이 지도했다고 본다. 자신들이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자 봉기했다는 것이다. 농민봉기가 도시시민과 봉기와 관련지어 일어났다. 이 계열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
14세기 이후 농민봉기의 성격은 그 이전과 비교해 성격이 달라졌다. 14세기 이전의 농민반란은 장원 내의 영주 폭정에 저항하는 것이 주요한 성격이었다. 세금감면, 부역감면등을 주장하면서 장원의 경게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1300년 이후 농민 반란은 두 가지면에서 달라졌다.
우선 규모면에서 넓은 지역에서 여러 장원내 농노들가에 연락으로 대규모로 일어났으며, 이는 자급자족경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이때에 상품유통이 영주의 경계를 넘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지도자의 성격도 변했다. 이전엔 자발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정도였으나, 이때에는 지도자중에 상공업자와 수공업자가 많았으며, 빈농보다 중농/부농이 더 많았다. 지도자의 성격도 농촌 부르죠와나 도시 부르죠와가 선구자적 역활을 많았다. 좌파 학자들은 발전중인 부르죠와가 농민들과 힘을 합하여 일으킨 난으로 농민반란을 평가하기도 한다. 와트타일러의 난때, 농민군은 여러 봉건적 속박의 철폐와 함께 "상품매매의 자유"를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처음 슈바르쯔발트(흑삼림지대)에서 시작된 봉기는 곧 독일의 서남부로 번져갔고, 독일의 1/3이상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뮌스터를 점령하고 농민왕국의 수립을 선포했으며, 12개조 요구를 제시하였다.몇가지만 살펴보면, "농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목사(사제)선출권을 갖도록 해달라", "십입조를 폐지하라(교회의 농민에 대한 압박과 착취거부)","인신예속을 폐지하라", "수렵, 어로, 사냥권은 산림채취는 공동권으로 영주가 세금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부역과 지대를 감면하라, 귀역,영주의 사냥을 금지하라", 등등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이중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바로 영주와 교회였다. 농민군은 곳곳의 교회와 수도원을 습격하여 파괴했다. 그러나,적절한 지도자의 부재와 지역에 따라 온건파의 과격파의 이해관계 대립심화로 공동전선을 펼지지는 못했다. 보수카톨릭과 신교파 제후들이 제후연먕을 구성하여 농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에 나섰고, 뮌스터의 농민왕국은 곧 무너져버렸다. 이후 오히려 독일에서 농노제는 강화되었으며, 재판농노제가 19세기까지 독일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은 농민공동자치를 통한 근대적 영역국민국가 수립을 추구하였다.농민은 원래 가지고 있던 구권리(영국에서는 "생득권")를 보유할 권리를 가진다. 구례의 관습법 무시. "구권리는 영방제후와 교황에 의해 침해당하므로 구권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일어섰다."라고 주장 → 독일근대화에 많은 영향을 미침
[편집] 결과
루터의 개혁은 이로써 북중부독일과 스칸디나비아반도지역에만 국한되게 되었다. 농민전쟁발발시점을 계기로 농민과 Luther와의 관계는 벌어졌으며, 루터는 정치화한다. 영방교회제 확립을 위해 루터를 지배층이 끌어들였고,(자신들의 지위를 확립코자 했음) Luther는 지배층에 결합한다. 점점 Lutherism은 스콜라학문화함. 1529년 가을엔 이미 에라스무스(Erasmus)와 결별했던 Luther는 Zwingli파와도 결별한다.
점점 Lutherism은 한정된 교의 지역안에서 도그마(dogman)가 된다. Luther개혁의 보수성은 멜랑크톤이 "카톨릭적 바탕에......"라고 언급한데서 그들의 보수성을 잘 알 수 있다. Luther는 슈말칼덴전쟁직전인 1546년에 죽었다.
재판농노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던 엘베강동쪽, 북동쪽등지에서 재판농노제가 강화되었고, 반란이 일어난 지역에서는 농민의 경제적 사황이 근본적으로 열악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엘베강 동쪽 지역에서는 융커(Junker들에 의한 대농장(Gutsherrschaft:농장영주제, 서유럽의 일반적인 장원은 독일어로 Grundherrschaft라 불린다)제도 강화되어 곡물수출위주로 나간다.
이러한 대농장제도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15세기부터 서서히 진행되던 시장권의 통일은 1834년(독일 관세동맹성립)까지 이루어지지 못한다. 대농장제도의 성립으로 여러 군데에 경제중심지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동부독일(현재 대부분 폴란드영토로 되어 있음)에서는 또한 농민분해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자본주의로 이행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융커계급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농촌-특히 동부독일-에는 봉건적인 속박이 그대로 남게 된다. 수공업에서도 길드(Zunft)의 여러 제한조치가 그대로 남게 되었다. 경제적이나 법적으로 자유로운 임노동자의 계급형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시적,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좌파사가들의 주장대로라면) 초기 부르죠와혁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부르죠와가 혁명에 성공했더라면 부르죠와의 성장에 봉건체제는 낡고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하기 때문에 없었을 것이고, 없에야 하기 때문이다. 1555년이후에도 독일의 종교적 분열은 계속되었고, 반동권력에 의해 상황은 어려워지기만 한다.
[편집] 봉기자들의 요구
극단적 복음주의를 주장하였으며, 중세적 속박에서 벗어난 농민들의 공동체를 세워 살자는 기독교적 공산주의를 주장하였다. 영방군주와 상업자본에 적대적이었다. 여기에서 가치 판단 문제가 발생한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절대국가시대)에 있어서 상업자본의 역할이란 막대한 것이다. 상업자본없이 산업자본으로 넘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이 상업자본에 농민들이 반대하였다면, 농민의 주장은 시대역행적인가, 아니면 기독교적 공산주의로 후대에 평가받기에 진보적이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농민과 Luther의 차이는 지배자에 대한 서로의 입장에서도 드러난다. 농민의 "만인평등"은 지배자에 왜 복종하는가? 였지만, 루터의 "만인평등"은 신 앞에서 신앙상의 평등이며, 지배자에게는 복종을 의미했다. 그의 후원자였던 봉건 제후들을 옹호하고 따라서 기독교적 신분제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편집] 중세 독일 정치사
1152년 호엔슈타우펜가문의 프리드리히1세가 서거하면서 호엔쉬타우펜가문은 종말을 고했고, 룩셈부르크왕가에 이어 오스트리아의 제후였던 합스부르크가 대신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태리문제(호엔쉬타우펜)와 국내문제에 매달려 제대로 왕역활을 하지 못했고,수십년동안 황제가 없는 촌극(대공위시대)을 연출하기도 했다. 황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영방제후들의 준동이 큰 역활을 담당했고, 또, 그럴수록 황제권은 약화되는 악순환을 거듭하였다. 정치생활의 중심이 제후들의 영방국가로 이동한 것이다. 농민반란실패후 융커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중앙권력은 더욱 약해졌다.
19세기초 나폴레옹이 독일에 침공할때에도 독일은 1천여개의 영방국가로 난립한 상태였으니, 그나마 이것도 많이 줄어든 것이다. 17세기에는 2000여개였다.대공위시대이래 독일에서는 영방국가를 중심으로 한 권력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한편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중앙권력이 존재하는 2원화된 형태로 6세기가까이 유지된다. 농민반란은 부르죠와나 농민에게 더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긍정적 결과는 로마카톨릭교회가 독일내에서 세력을 잃었다는 것 뿐이다. 적어도 이중의 고통에서 한 짐은 벗어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익을 얻은 것은 독립성을 쟁취한 귀족들뿐이다.
[편집] 30년전쟁
30년 전쟁은 독일땅으로 외세의 복잡한 갈등을 끌어들인 결과이다. 영방군주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세력다툼을 일삼게 된것이다.크게 두 세력이 있었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제국을 이룩한 합스부르크왕조 및 카톨릭연합세력,그리고 초기 부르죠와와 다른 귀족들간의 연합세력이다.
나중에 가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라는 독일내 주도권쟁탈전을 벌이는 두 국가가 나오지만, 이때는 아직 프로이센은 일개 제후국에 불과한 처지였다. 프로이센은 이땐 "왕국"의 호칭도 갖지 못한 상태이다.
전쟁의 시작은 보헤미아인들이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면서 시작되었다. 제1단계에서는 보헤미아와 Platz간에, 제2단계에서는 덴마아크와 네덜란드의 개입, 제3단계에서는 스웨덴의 개입, 마지막 제4단계에서는 스웨덴군을 도와 프랑스군(카톨릭인데!)이 개입한다.
이 전쟁으로 독일전체는 피폐화되었고, 인구의 1/3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등에서 일시적으로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나나 실패하기도 했다. 1648년에 맺은 베스트팔렌평화조약이 맺어졌다.
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확정되었으며, 프랑스는 알사스-로렌을 차지하고, 프로이센이 확장되었다. 이때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프로이센은 18세기초에 왕국이 될수 있었다. 브레멘과 베르뎅은 스웨덴이 점령했으며, 프랑스와 스웨덴은 독일 제국의회에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이 두 강국(당시엔 스웨덴은 군사강국이었음)이 독일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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